●강의명: 현실을 재창조하라
●강의날: 2006년 10월 12일 목요일
●강의자: 흰빛님
●녹음시간: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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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현실을 재창조하라

*** 너희가 이번 생에서 되고자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지금껏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웅장한 차원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임을 알아라. ***


1. 현실에서 환상과 만났을 때  재창조

현실의 문제에 직면한 순간 처음으로 해선 안 될 일

-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려 하는 것 - STOP!

- 환상을 진짜처럼 여겼던 습 점검 - 그렇지 않은 경우는 빼고

ex)그 밥에 그 나물, 굴뚝 청소한 손으로 얼굴 닦기, 지저분한 걸레로 청소


가. 세 가지 궁극의 진리 떠올리기

1) 내 세계의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다.

(1) 환상을 환상으로 본다

환상이 흡사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중요

와이 환상이 진짜처럼 보일까? - 집단의식


2) 내가 뭔가에 부여하는 의미가 곧 그것의 의미다

(1) 환상의 의미를 결정한다

신의 가장 큰 선물 -> 자신의 모든 것의 의미를 결정할 기회 

자유 -> 모든 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도록

삶은 무의미 -> 삶의 의미부여 내가 결정한다!

어떤 특정일, 사건, 상황이 자신에게 왜 일어났는지 자문 STOP!

-> 그 모든 이유를 자신이 선택, 결정

->그럴 수 없다면 그 모든 걸 꾸며내라 - 의식하면서 (인생을) 결정하라


3) 내가 나라고 일컫는 것이 나이고, 내 체험이라고 일컫는 것이 내 체험이다.

(1)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한다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를 밝히고 선언하고 표현하고 체험하고 실현하고 그것이 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그 다음에 체험하게 될 것을 의식하면서 창조

자신의 내면 현실을 바꾸는 것으로 자신의 외부 체험을 바꿀 수 있다.



본인의 실예 -산, 강의 현실 재 창조





- 신나이 구절 ... 신과 나눈 교감에서 -

**너희가 이번 생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지금껏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웅장한 차원을 표현하고 체험하는 것임을 알아라. 만약 너희가 이것을 의식 차원에서 체험하지 못하면, 즉 이것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 것 같다면, 너희는 내가 지금 너희에게 보내는 이 이야기의 어떤 부분도 적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 중 어떤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너희 삶의 모든 순간이 신성한 순간이고, 창조의 순간이다. 순간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니, 순간 순간 너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너희의 여행이다. 그것은 너희 스스로 만들어낸 악몽에서 너희를 벗어나게 하여, 너희 삶이 되기로 되어 있던 그런 멋진 꿈속으로 이끌어 줄 여행이다. 그것은 창조주와 만남으로 너희를 이끌어 줄 여행이다.


**나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게 했다. 너희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계속해서 창조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껏 '자신'에 대해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웅장한 차원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재창조하고 있다. 너희는 순간마다 새로 태어난다. 다른 모든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너희의 역할은 '지금'이라는 모든 각각의 '순간'에 너희가 '자신'에 대해 지금까지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웅대한 차원으로 너희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진화라고 불러온 과정이다.



**너희는 '환상' 덕분에 '실재'를 체험하고 알게 될 테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환상'인 건 아니니, 너희가 환상 속에서 체험하는 '자신'은 '참된 자신'이 아니다.

'환상'이 진짜라고 여기는 한, '참된 자신'을 기억해 낼 수 없다. '환상'은 환상이란 걸, 대단히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너희 스스로 창조했지만, '환상'자체가 실재는 아니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항상 잊지 마라, 너희 세상은 '환상'의 세상이고, 너희가 보는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며, 너희는 '궁극의 실재'를 장대하게 체험하기 위해 그 '환상을 이용'할 수 있다는걸. 사실 너희가 여기와서 하려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는 자신이 만들어낸 꿈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평생의 꿈이 되게 하라. 왜냐하면 그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너희 안의 남신과 여신이 결코 부정되지 않는 세상, 너희가 다시는 다른 사람 안의 남신과 여신을 부정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라.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마스테'가 너희의 인사가 되게 해라.

사랑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이고, 모든 상황에 대한 반응이며, 모든 순간의 체험이 되는 세상을 꿈꾸어라.


**나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게 했다. 너희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부터 자신을 계속해서 창조하고 있다. 너희는 지금껏 '자신'에 대해 지녔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웅장한 차원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재창조하고 있다. 너희는 순간마다 새로 태어난다. 다른 모든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너희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것을 무효화할 수 있다. 환상을 있는 그대로, 즉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현실로 보고, 환상이 마치 진짜인 양 그것에 의해 사는 것을 그만두기만 하면 된다.



**너희의 현실을 재창조하라

영원을 향해 여행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동안, 너희는 살아 가면서 여러 상황과 조건,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개중에는 달갑잖아 보이는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에 맨 먼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려 한다. 하지만 사실 너희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그것이다.(처음 하는 것은 아니다란 의미)

어떤 사람은 그런 일이 일어난 데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내려 한다. 또 특정 상황을 '징조'라고 부르면서, 그 징조가 자신에게 뭘 이야기해 주는지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이런저런 식으로 그들 삶의 사건과 체험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진실은 어떤 것에도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삶의 만남과 체험에 숨겨진 진실 같은 건 없다. 누가 그런 것을 거기에 숨기고, 왜 굳이 숨기겠는가?

만약 너희가 찾아내야 할 뭔가가 있다면, 명확히 드러내 보이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만약 신이 너희에게 말할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너희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만들기보다는, 그냥 대놓고 이야기하는 쪽이 훨씬 편하지 않겠는가?(더 친절한 건 물론이고.)

진실은, 너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 말고는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삶은 무의미하다.

많은 인간들이 이 진실을 받아들이길 어려워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나의 가장 큰 선물이다. 나는 삶을 의미 없게 만드는 것으로, 너희에게 모든 것의 의미를 결정할 기회를 주었다. 삶의 모든 것과 관련하여 자신의 결정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도록.

사실 이것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를 체험하게 해주는 수단이다.

이런 게 바로 자기 창조 행동, 너희가 지금껏 '자신'에 대해 가졌던 가장 위대한 전망의 가장 웅장한 해석으로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너희한테 일어나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자문하지 말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너희가 선택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너희가 결정하라. 만일 의도를 가지고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면, 그 모든 걸 꾸며내면 된다. 사실 너희는 그렇게 하고 있다. 너희는 자신이 그렇게 하는 이유, 즉 상황이 그런 식으로 벌어지는 모든 이유를 꾸며내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의식하지 않고서 이렇게 하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의식하면서 마음을(그리고 너희 인생을)결정하라!

삶의 의미도, 어떤 특정한 일이나 사건, 상황의 의미도 찾지 마라. 그보다는 너희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라. 그런 다음 그것과 관련해서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밝히고 선언하고 표현하고 체험하고, 실현하고, 그것이 되어라. 만일 너희가 세심한 관찰자라면,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할 때까지 똑같은 상황이나 환경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삶으로 끌어온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이다.


선각자와,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에 올라선 구도자들은 '환상'이 환상임을 알고, 그것이 거기에 있는 이유를 정한 다음, 그 '환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그 다음에 체험하게 될 것을 의식하면서 창조한다.

어떤 삶의 체험에 마주쳐도 너희 또한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공식-과정-이 있다. 그냥 이렇게 진술하면 된다.


1. 내 세계의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다.

2. 내가 뭔가에 부여하는 의미가 곧 그것의 의미다.

3. 내가 나라고 일컫는 것이 나이고, 내 체험이라고 일컫는 것이 내 체험이다.


이것이 삶의 환상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방식이다. 강조는 더 명확한 이해를 제공하기 마련이니, 이제 또 다른 '현실 삶'의 예를 택해서 살펴보고, 앞서 다룬 관찰들로 다시 가보자.


'필요의 환상'과 마주쳤을 때, 너희에게는 이 체험이 흡사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 '필요'는 자신의 필요와 다른 사람의 필요라는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쓰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필요'가 자신의 필요인 듯이 보일 때는 훨씬 더 다급하게 느껴질 것이다. 또 자신이 상상하는 '필요'의 성격에 따라 곧바로 두려움이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자신이 산소가 필요하다고 상상하면, 너희는 순식간에 공포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선각자나 임사 체험을 하여 죽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히 아는 사람들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아마도 자신을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이렇게 되도록 훈련할 수 있다.

역설은 이것이 요구하는 게 바로 그 침착함이라는 점이다. 침착함만이 평온한 결말을 끌어낼 수 있는 생각과 행동을 불러올 수 있다.

잠수부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공기가 떨어져 가고 있다고 느낄 때나 산소가 바닥났을 때, 공포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운다. 매우 긴박하고 두려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공포에 빠지지 않는 법을 배웠던 사람들은 이외에도 많다.

이만큼 극단적이진 않지만,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거나 무장 강도에게 습격받는 경우처럼 두려움을 일으키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들은 많다. 그러나 죽음을 코앞으로 불러오는 그런 질병이나 가족이 위험에 처한 그런 상황에서도 비범한 평정심을 발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어떤 것과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모두 관점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것, 너희의 관점이다.

죽음의 환상을 환상으로 보면 모든 것이 바뀐다.

자신이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 그것의 의미를 결정할 수 있게 해주고, 삶 전체가 재창조 과정임을 이해하는 것이 죽음과의 관계에서 '참된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맥락을 창조하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평온하고 기품 있게 죽음을 겪어냄으로써 주변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이외에도 많다. 생명이 위태로운 체험보다 덜한 차원에서는, '환상'으로서 '필요'의 힘이 훨씬 줄어든다. 몸의 아픔보다 덜한 차원에서는, 그것은 사실상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인간이 몸의 아픔을 무척 힘들어 한다. 그래서 아파하는 순간에 누군가가 '그건 환상이야.'라고 일러준다 해도, 고통받는 당사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아픔과 그것의 가능성이 죽음보다 더 두렵다.

그러나 이 환상도 해결할 수 있다. 이 대화 앞부분에서 나는 아픔과 고통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삶의 환상'을 그것의 원래 목적대로 보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선각자들은 이 차이를 안다. '필요의 환상'이라면 인간이 고통받지 않고 행복해지려면 아픔 없는 상태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증언할 수 있듯이, 아픔과 행복은 상호 모순이 아니다.

아픔으로 부터의 자유(아픔 없는 상태)는 요구(필요)가 아니라 [개인 의지에 의한]선택(선호)이다.Freedom from pain is not a need, it is a preference. 이렇게 '요구'선택의 차원으로 옮겨놓을 때, 너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체험을 지배할 놀라운 힘을 가질 수 있다. 너희는 아픔을 지배하기에 충분한 힘, 사실상 그것을 무시하고 종종 그것을 실제로 사라지게까지 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증명했다.

몸의 아픔보다 덜한 차원에 있는 '필요의 환상'을 다루기는 훨씬 더 쉽다. 아마도 행복해지려면 어떤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성공하려면 일자리가 필요하다거나, 만족하려면 다른 어떤 감정적 충족이나 신체적 충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 그런 것 없이도 존재한다는 걸 알아채고 싶을 때,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도 왜 너희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세심하게 검토해 보라, 그러면 너희는 자신이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행복은 체험이 아니라 결정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없이도 너희는 행복해지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이제 너희가 이해하게 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이 진술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고자 한다. 행복은 체험이 아니라 결정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없이도 너희는 행복해지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러면 너희는 행복해질 것이다.

체험은 너희가 내리는 결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덧붙여 말하면,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은 반응이 아니다. 사랑은 결정이다. 이 점을 기억해 낼 때 너희는 깨달음에 다가가고 있다.)

'필요'의 두 번째 가면은 다른 사람의 필요란 가면이다. 이 '환상'을 환상으로 보지 않으면, 너희는 다른 사람, 특히 자식이나 배우자나 친구처럼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고자 계속해서 애쓰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자신과 도움받는 상대방 모두에게서 소리 없는 분노를 불러오다가 결국에는 분노의 폭발을 불러온다. 바꾸어 말하면 자식과 배우자를 포함하여(그리고 틀림없이 특히)남들의 요구를 계속해서 충족시켜 주는 것이,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들을 돕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그 환상을 이용하여 너희가 체험하고자 하는 너희 부분을 표현할 수 있게 하라. 아마도 너희는 연민이나 너그러움, 친절함이나 나름의 풍요, 혹은 그 모두를 체험하고자 하는 너희 부분으로 택할 테지만, 자신이 하는 어떤 일도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라. 다음 진술을 외워둬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도 너희가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다. 그러니 다시 한번 되풀이 하자.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진실일 뿐 아니라 신의 진실이기도 하다. 유일한 차이는 신은 이것을 안다는 것뿐이다. 자신만이 존재하니, 자기 이익 말고는 다른 어떤 이익도 없다. 너희는 모든 것과 '하나'이고 너희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점에 대해 명확해질 때, 자기 이익에 대한 너희의 규정도 바뀔 것이다.

'실패의 환상'과 마주쳤을 때, 너희에게는 이 체험이 흡사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 '실패'는 자신의 '실패'와 다른 사람의 '실패'라는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쓰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실패인 듯이 보이는 것과 마주쳤을 때는, 즉각 세 가지 궁극 진리를 떠올려라.


1. 내 세계의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다.

2. 내가 뭔가에 부여하는 의미가 곧 그것의 의미다.

3. 내가 나라고 일컫는 것이 나이고, 내 체험이라고 일컫는 것이 내 체험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진리, 즉 성스러운 삼위일체다.

너희의 실패 체험이 의미하는 바를 결정하고, 실패를 성공이라 부르기로 선택하라. 그런 다음 이 실패에 직면해서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라. 자신이 겪고 있는 체험과 관련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라. 왜 자신이 그런 일을 겪고 있는지 묻지 마라. 이유는 없다. 너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이유 말고는.

그러니 이렇게 결정하라. '내가 이런 체험을 한 건 내가 바라는 성공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기 위해서야. 이 체험은 내게 주어진 선물이야.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고 그것에서 교훈을 얻고 있어.'

모든 배움은 기억해내기라고 했던 내 말을 잊지 마라.

그러니 실패를 축하해라. 너희 행성에는 실제로 이렇게 하는 깨달은 기업인들이 있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실수'를 찾아내거나, '실패'를 체험했을 때, 그 사건에 박수를 보내라고 모든 직원에게 권하는 사장이! 그 사장은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직원들은 그를 위해서라면 널빤지 위를 걸어가서 얼음물로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직원들에게 자신들과 자신들의 창조성을 가장 장대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안전한 환경과 성공적인 분위기를 사장이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분리의 환상'과 마주쳤을 때, 너희에게는 이 체험이 흡사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 '분리'는 자신의 '분리'와 다른 사람의 '분리'라는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쓰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마도 신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너희 동료 인간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또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로움이나 우울 따위의 작은 환상들도 함께 생겨날 수 있다. '분리'인 듯이 보이는 것과 마주쳤을 때는, 즉각 세 가지 궁극 진리를 떠올려라.


1. 내 세계의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다.

2. 내가 뭔가에 부여하는 의미가 곧 그것의 의미다.

3. 내가 나라고 일컫는 것이 나이고, 내 체험이라고 일컫는 것이 내 체험이다.


이것은 삼중의 과정을 불러온다.


ㄱ. '환상'을 환상으로 본다.

ㄴ. 그것의 의미를 결정한다.

ㄷ.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한다.


외롭다고 느낄 때, 자신의 '외로움'을 환상으로 보아라, 너 자신의 외로움은 자신이 주위 세상에 충분히 손을 뻗치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결정하라. 온통 외로운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외로울 수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런 다음에는 사랑을 가지고 남들을 만나는 사람으로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기로 선택하라.

삼 일 동안만 이렇게 하면 기분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고, 삼 주 동안을 이렇게 하면 외로움이 끝날 것이다. 석 달 동안을 이렇게 하면 너희는 다시는 외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외로움은 순전히 환상이며, 자신이 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완전히 고립되어 교도소 독방에 갇혔거나, 아파 누워 있는 사람도 자신의 내면 현실을 바꾸는 것으로 자신의 외부 체험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이 책이 너희를 데려가는 바로 그 체험인, 신과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일단 너희가 내면의 창조주와 만나고 나면, 외롭게 느끼지 않으려고 자기 외부의 뭔가를 필요로 하는 일이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모든 시대에 걸쳐 신비가와 승려, 종교 공동체와 영적 수행자들이 영적인 교감과 피조물 전체(이게 '나'다!)와의 '합일'이 주는 내적인 희열은 외부 세계의 어떤 것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증명해 왔다.

사실 '분리'는 환상이다.

그러니 너희 또한 모든 것을 '참된 자신'을 선택하고 체험하게 해주는 환상이자 축복받은 선물로 보게 되리라.


몇 가지 '환상'을 더 이용해서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어느 환상이나 이용할 수 있으며, 공식은 동일하다). '처벌'의 환상과 마주쳤을 때, 너희에게는 이 체험이 흡사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 '처벌'은 자신의 '처벌'과 다른 사람의 '처벌'이라는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쓰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월'의 환상과 마주쳤을 때, 너희에게는 이 체험이 흡사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 '우월'은 자신의 '우월'과 다른 사람의 '우월'이라는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쓰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무지' 의 환상과 마주쳤을 때, 너희에게는 이 체험이 흡사 진짜처럼 보일 수 있다. '무지'는 자신의 '무지'와 다른 사람의 '무지'라는 두 가지 가면 중 하나를 쓰고 나타나기 마련이다. 유형을 알겠느냐? 내가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이 '환상'들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너희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느냐?

다른 사람의 '처벌'과 만나면, 너희도 그들을 처벌하고 싶어질 것이고, 너희의 '처벌'에 직면하면, 다른 사람도 너희를 처벌하고 싶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우월'를 만나면, 너희도 자신을 그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어질 것이고, 너희의 '우월'을 만나면, 다른 사람도 자신을 너희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어질 것이다. 유형을 알겠느냐? 내가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이 '환상'들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너희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느냐? 유형을 아는 건 중요하다. 이것은 문화 이야기라는, 전에 너희가 새겨 넣은 무늬다. 이 무늬가 지구에서 지금 벌어지는 대로의 집단 현실을 너희에게 체험케 한 것이다.

이제 이 '환상'들에서 비켜서서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관한 더 많은 사례를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계속해서 구체적인 예를 보여 준다면 너희는 내게 의존하게 될 테고, '현실 삶', 일상 체험을 앞에 놓고 어떻게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해야 할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거나 모르겠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기도하기 시작할 것이고, '신이여, 도와 주소서!'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일이 잘 풀리면 내게 감사하고, 일이 잘 안 풀리면 나를 원망할 것이다. 내가 어떤 소원은 들어주고 다른 소원은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이....., 혹은 더 심하게는, 어떤 사람의 소원은 들어주고 다른 사람의 소원은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소원을 들어주거나 거부하는 건 신의 직무가 아니다. 무슨 근거로 내가 그렇게 하겠느냐? 어떤 기준을 가지고?

다른 것은 다 놔두고라도 이것만은 알아둬라. 신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나에게는 너희가 뭔가를 갖게 될지 말지를 결정할 기준도 없다.

그것을 결정하는 건 너희다.

너희는 그 결정을 의식하면서 내릴 수도 있고 의식하지 않고 내릴 수도 있다. 너희는 지난 몇 세기, 아니 몇 천 년 동안 의식하지 않고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여기에 너희가 의식하면서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ㄱ. '환상'을 환상으로 본다.

ㄴ. 그것의 의미를 결정한다.

ㄷ.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한다.


위의 방법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로 궁극 진리인 다음 진술들을 사용하라.


1. 내 세계의 어떤 것도 진짜가 아니다.

2. 내가 뭔가에 부여하는 의미가 곧 그것의 의미다.

3. 내가 나라고 일컫는 것이 나이고, 내체험이라고 일컫는 것이 내 체험이다.


내가 여기서 너희와 나누어 온 대화는 너희가 내면 자각의 깊은 수준에서 직관으로 이해하는 복잡한 개념을 인간의 말로 바꾸려는 너희 나름의 시도다.

이 발상은 이미 그 전에 너희를 통해서 너희에게 온 것들이다.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그것이 마치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게 환상이다.

너희는 이 체험을 자신을 통해서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가져다 주었다. 너희가 기억해 내는 과정이 이런 것이다.

이제 너희의 '환상'을 살아 있는 현실로 대신함으로써, 이 말들을 육신의 체험으로 바꿀 기회가 왔다. 이것이 내가 앞서 말했던 너희 행성 차원에서의 삶의 전환이다. 그래서 나는 영감을 주어 이런 말이 세상에 있게 한다.

'그리하여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