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최근까지, '완벽'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


내용인즉슨, '나의 선택과 결정은 완벽하다.', '내가 저지른 일은 모두 완벽해!', '내가 야기한 이 상황은 완벽한 것이니, (나는 책임질 이유가 없어.KIN - 표현은 안하지만 내심 속에서 ...)' 등의 진술 속에 '완벽'에 대한 완벽한 오해를 완벽하게 담아, 나는 생각하고 말하여 왔다. 이러한 인식의 오류에서 야기된 내 생각과 말은 현실 삶에 특정 체험들을 야기했고, 나는 그것을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악순환의 원'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구체적인 체험은 조금 후에 자세히 언급하려 한다.


'완벽'에 대한 오해로 인한 악순환의 체험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해는 오해를 풀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무한정 제공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내 영혼의 바람이며, 내 영혼이 나를 위해 하고 있는 일이며, 내가 창조하는 삶의 모든 환경들이 또한 미리 보내어진 감사한 선물로서 이러한 기회의 제공을 위한 것인데. 신나이1권 68쪽에서는 "성신(체험한 영적 존재)이 하는 일은 너희가 자신의 잘못에서 벗어날 새로운 오성에 이를 수 있도록 너희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를테면, 타인으로 부터 오해를 받게 되는 체험이라던지 내 기대와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상황의 체험 - 나의 경우에는 신불자 카드빚 이자 합쳐 삼천 만원, 가계 파산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에 대한 오해를 계속 옳은 것으로 붙들고 있던 나는, 현실 상황과 그런 상황을 마련하여 보내준 이 우주나 신에 대해 감사한 기회나 존재로 보지 못하고, 저주내릴 체험이며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엉터리 같은 내 체험 속에서도 우주는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니, 놀랍기도 하고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완벽'에 대한 오해를 풀고, 제대로인 인식의 기회를 맞고 있는 나 자신에게 나름의 성과라 여기며 스스로를 다독거려 본다. 신나이에서는 "너희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걸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것으로써 자신의 현실을 체험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너희가 자신의 현실을 창조함을 증명 해준다." 라고 표현되어져 있다.


'완벽'에 대한 오해는 신나이 회원 중 많은 분들에게 만연해 있음이 관찰 되어, 미약하나마 내 스스로의 오해를 풀고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 이해의 과정을 함께 나누어, 많은 분들과 더불어 '완벽'에 대한 제대로인 인식의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 관찰의 근거 - 그 동안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확인된 분들로 그대반짝이님, 리한님, joo님, 리멤버님, 샤인님 등 제가 알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서 '완벽'에 대한 오해와 이로 부터 비롯된 반복되는 체험의 순환을 살필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일부는 게시판의 많은 게시물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답니다. )


[ 완벽의 의미 ]

  1. 우주의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한다.
  2. 신은 완벽하다. 궁극의 결과는 보장되어 있다.
  3.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예를 들어, 신나이 사이트에 접속하여 정보를 얻는 것에 비유해 본다. 나는 인터넷이라는 시스템 그중에서도 웹이라는 서비스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기에, 그것을 믿고 인터넷을 통해 사이트 접속하여 게시물을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들을 얻어 간다. 간혹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사이트 자체는 총회에서 폐쇄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언제나 인터넷상에 남아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믿고, 또 다음 기회에 접속을 시도하고 필요한 정보를 취득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이트의 존재를 믿는다기 보다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신나이' 라고 입력하면, 그 기능이 완벽하게 작동하여, 신나이 사이트를 컴퓨터 모니터에 뿌려주게 되는 것 이것을 알고 있기에, ‘믿음’을 넘어 그냥 그렇게 알고 있기에 받아들이고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접속 불량이 발생해도, 내 컴퓨터의 이상이나 내 행위의 오류를 점검하게 되지, 그것이 작동하게 되는 인터넷 시스템 자체를 의심하거나 불신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우주의 작동 또한 완벽하다는 것이 신나이에서 표현하고 있는 ‘완벽’함의 진정한 의미인 것으로 인식되어진다. 그리고 완벽한 우주를 작동하는 주체는 신이 아닌 창조자인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현실 삶에 드러나는 어떠한 체험이나 상황, 사건, 사람들은 결국 내 요청에 따라 완벽하게 작동하는 우주 시스템을 통해 내가 창조한 것들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에 미리 응답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우주며, 생명과 생명 과정 전체를 창조한 창조주의 완벽함이다. 그래서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미리 보내어진 선물이라고 까지 신나이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한 상황을 신이 보장하고 있음을 더 나아가 궁극의 결과 까지도 확고히 보장함이 이 완벽함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결정이 골치를 아프게 한다. 사실 현재 겪고 있는 체험과 사건, 상황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은 내 영혼의 자각과 성장이라는 목적에 비추어 가장 완벽하게 신께서 마련해 주신 그것도 미리 보내주신 선물이며, 기적이고 천사라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부정은 부정을 해소하기 위한 또 다른 순환의 체험을 야기한다. 내 믿음이 틀렸다는 것을 틀린 믿음을 통해 계속 체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체험은 악순환이 되고, 사건은 죽을 고비로, 상황은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은 천사가 아닌 진짜 악마로써 체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내 스스로가 부정을 통한 부정의 체험을 창조함으로 해서 내 스스로의 삶을 창조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근데 이거 몇 년을 반복하다 보면, 정말로 짜증난다. 체험에 물려 버린다. 이런 나 자신이 한심해 진다. 지금의 내 체험 중 일부가 그러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ㅜㅜ;


'완벽'에 대한 오해는 "신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신의 완벽함과 우주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신뢰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지금 현재의 체험이 결코 감사할리 없다. 지금 현재가 감사하지 못하니, 지속되는 것은 감사하지 못한 체험일 뿐이며, 내 존재가 변하기 전까지는 이 체험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유사한 형태로, 더 나아가면 더 깊어진 골로. 내 2000년도 당시 내 초기 부채는 300 만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3,000 만원이 되어 있다.


‘완벽’에 대한 이해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는 것이며, ‘신에 대한 믿음’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내면 체험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것으로 가능해 지는 것들이다. 나 자신의 재구성 과정은 이러했다. 우리(‘완벽’을 오해하는 분들에 한하여) 이제 솔직해 지자, 먼저 인정해야 될 것이 있다. 나는 몇 해 동안을 <신과 나눈 이야기>를 읽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떠들어 왔지만, 나는 지금 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 창조주를 의심하고 있으며, 세상을 못미더워하고, 이 우주가 완벽히 작동하고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더 심하게 그 기본 개념조차 오해하여, 나의 선택이 완벽하고, 내가 완벽한 것이지, 결코 신이 완벽한 것이 아니다, 또 내가 일으킨 모든 상황 또한 완벽하다고 착각하였다. 이 또한 ‘신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인정이 바로 이런 것임을...


‘신에 대한 불신’ 속에 있으면서 절대 아닌 척 하지말자, 신나이에 이런 표현이 있다. “그러나 정말로 이해하고 있느냐? 너희가 살아 온 삶 자체가 자신이 무엇을 이해했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다. 삶이야말로 너희의 가장 깊은 인식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내 이해의 정도는 삶 자체로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면 두 눈은 잠시나마 강한 빛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몸뚱이 전부는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드러나 있게 된다. 설령 그 모습을 세상사람 모두가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영혼들과 신은 이미 다 보고 계심이 진리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최소한 나 스스로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번에도 또 속이려 든다면. 정말로 재미없는 삶이라고 푸념하고 상처 받는 내 영혼과 당신의 영혼이 있을 뿐이겠다. 사실 여태껏 이것조차 믿지 못하고 있던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럽다. 무척이나 ...


‘완벽’에 대한 오해로 체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체험을 하고자 하는 모든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특히 그대반짝이님, 리한님, joo님, 리멤버님, 샤인님과 함께 나누고 싶답니다. ( 혹여 제 관찰이 정상적 작동에 문제가 있어, 포함되지 않을 분의 닉네임이 언급되었더라도 너무 노여워 마시고, ‘완벽’에 대한 오해와 ‘신에 대한 불신’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나누어 좀 더 확장된 인식으로 각자의 삶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기회이길 기원합니다. )

항상 감사로.


그리고 특히 나의 사랑스러운 "어머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 천사께서 야기한 가계 파산 상황과 제 개인 부채 3천만 원에게도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런 상황이 없었다면 진리 탐구나 신나이 실현이라는 목적에 그나마 가깝게 있기는커녕 어디를 튀어도 튀어 있을 나였기에, 아마도 저는 여성 신도 많은 종교 단체에 폭 빠졌겠지요... 신이 보시기에 내가 진정 바라고, 내 영혼이 진정 뜻하는 바를(진리의 방향으로), 이룰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은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기에.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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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과 관련된 신나이 구절 - 참고하세요. ]


삶의 모든 것은 너희 자신의 창조 도구일 뿐이며, 삶의 모든 사건은 단지 '자신이 누구인지' 판단하고 '자신'이 될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영혼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므로, 이 우주에는 어떤 희생자도 없으며 오로지 창조자들만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 개개의 영혼은 지금이라는 순간마다 자신의 더없이 고귀한 목적에 맞고, 가장 빨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데 적합한 상황과 조건을 창조한다.

각각의 상황은 모두 하나의 축복이며, 체험 하나하나마다에는 진짜 진정한 보물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기로 선택한 그 모든 일들에서 너희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소위 장애 있는 신체를 지닌 한 영혼은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한 것이 아니라고 억측하지 마라. 너희는 그 영혼이 무엇을 하려는지 모른다. 너희는 그것의 진행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모든 조건을 축복하고 그것들에 감사하라. 신이 창조한 것들의 완벽성을 인정하고 그 창조물들에 믿음을 보여라.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우연의 일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구잡이식 선택이나. 너희가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 역시 그 세계를 희롱할 수도 없다.

눈 한 송이가 그 도안에서 더없이 완벽하다면, 너희의 삶만큼 장대한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하지만 예수조차도 병자를 치료했습니다. 만일 그들의 상태가 그토록 「완벽」했다면 예수는 왜 그들을 치료했을까요?

예수는 그들의 상태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을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는 그 영혼들이 자기과정의 일부로서 치료를 요청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그 과정의 완벽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영혼이 뜻하는 바를 인정하고 이해했다. 만일 예수가 정신의 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모든 질병이 불완전을 나타낸다고 느꼈다면, 그는 지구상의 모든 이들을 그냥 한꺼번에 치료하지 않았을까? 너는 예수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의심하느냐?


왜 자꾸 그녀라고 말씀하십니까? 당신은 여자입니까?

나는 그도 그녀도 아니다. 내가 종종 여성 대명사를 사용하는 건 편협한 너희 사고방식에서 너희를 뒤흔들어 떼어내고자 함이다.

신을 한 가지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너희는 다른 건 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그건 크나큰 잘못이 되리니.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천국에 갔다.

지옥은 없다. 따라서 천국 말고 그가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다.

그의 행동들은 너희가 잘못이라고 할 만한 것들, 즉 진화되지 않은 존재의 행동들이다. 그러나 잘못을 유죄 판결로 벌줄 수는 없다. 그것은 교정할 기회, 진화할 기회를 제시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히틀러로 인해 죽은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저지른 잘못이 어떤 해악이나 손상을 입힌 건 아니다. 그 영혼들은 번데기에서 부화하는 나비처럼 지상의 속박에서 풀려났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건 단지 그 영혼들이 들어선 기쁨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닌 시기에 너무 일찍 일어났다는 것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 '잘못되었다'는 너희 주장에는, 예정되지 않은 때에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우주에서는 모든 일이 완벽하다. 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너희가 모든 것에서, 너희가 동의하는 것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특히)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에서까지 완전한 완벽성을 볼 때, 너희는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내가 이 대화에서 너희에게 말했던 것 중 많은 부분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건 물론 의도가 있어서다. 너희가 새로운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전에 주어졌던 모든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너희 중에는 더 빨리 앞서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알았어, 난 벌써 이해했다구!」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해하고 있느냐? 너희가 살아 온 삶 자체가 자신이 무엇을 이해했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다. 삶이야말로 너희의 가장 깊은 인식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너희 삶이 끊임없는 기쁨과 완전한 행복을 체험하고 있다면, 너희는 내 말을 진실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은 너희 삶에 아픔과 고통과 실망을 불러올 수 있는 조건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기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체험은 조건과는 무관하다.

이것이 내가 이미 여러 번 말했던 조건 없는 사랑이다. 너희는 이 조건 없는 사랑을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 체험할 수도 있고 「삶 자체」와 관련해서 체험할 수도 있다. 너희가 「삶」을 무조건 사랑할 때, 너희는 삶이 바로 여기서 바로 지금 자신을 드러내는 바로 그 방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완벽을 보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내가 말하노니, 만물과 만인이 완벽하다. 이것을 볼 수 있을 때, 너희는 깨달음으로 가는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바와 천지만물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않는 한, 또 그렇게 할 때까지는 이것을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이 대화가 주요 논점으로 계속해서 되돌아가는 목적이 너희의 이해를 더 깊게 하고, 너희를 깨달음에 더 가까워지게 하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너희는 그런 되풀이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너희는 그것의 이로움을 이해하기에 그것을 좋아할 것이다. 그 선물을 반길 것이다.

이런 이해는 지금 이순간과 너희 삶의 모든 순간에 평정을 가져다 줄 것이다. 예전 같으면 몹시 불쾌한 상황으로 판단했을 순간에도 평정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 죽음 또한 완벽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훨씬 더 큰 깨달음으로 평정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건 모든 순간이 죽어가는 순간임을 이해할 때다. 모든 순간이 이전의 너희로서는 삶의 끝이요, 지금 되고자 하는 너희로서는 새 삶의 시작이다.

순간순간마다 너희는 자신을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각하든 전혀 모르든 상관없이, 너희는 이렇게 하고 있다. 더 많은 삶을 체험하기 위해, 굳이 소위 말하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야 하는 건 아니다. 너희는 원할 때마다 더 많은 삶을 체험할 수 있다. 백 가지 다른 방식으로, 백 가지 다른 시간에, 너희가 태어난 순간과 죽는 순간에,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순간에, 내가 장담하건대, 육체가 죽는 순간에 너희는 틀림없이 더 많은 삶을 체험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 많은 삶이 있고, 삶은 영원히 계속되며,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이 확신시켜 줄 것이다. 그 순간, 너희는 부족이란 없다는 것, 「삶」과 삶의 소재들이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다시 한 번 말하노니, 「삶」의 모든 것이 선물이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 삶은 너희 안에서, 너희로서, 너희를 통해 완벽함 그 자체를 완벽하게 표현해 줄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완벽한 도구다.

눈 한 송이가 그 도안에서 더없이 완벽하다면, 너희의 삶만큼 장대한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적절한 쪽은 그 선택을 관찰하고, 그런 다음 그 영혼이 좀 더 고상한 선택을 추구하고 더 고상한 선택을 내리고자 할 때, 그것을 도와줄 뭔가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의 선택을 주의 깊게 지켜보되 판단하지는 마라.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완벽하다는 걸 그들이 깨닫게 해주라. 그러나 그들이 더 새로운 선택, 또 다른 선택, 즉 더 고상한 선택을 하려는 때가 오면 기꺼이 그들을 도울 수 있게 옆에서 있도록 하라.

타인들의 영혼과 깊이 교감하라. 그러면 너는 그 영혼들의 목적, 그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자신이 치료해준 사람들과, 자신이 그 삶에 접촉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는 자기에게 온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내 치료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 모두를 치료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마구 치료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했다면 그건 우주의 성스러운 법칙을 모독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즉 모든 영혼이 제 갈길path을 가게 허용하라allow는 법칙을.

그러나 들을 귀를 가진 사람들은 귀 기울여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나니 너희는 죽게 되어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너희의 물질 형상은 너희가 마음으로 창조해낸 현실을 체험하고, 너희가 창조해낸 자아를 영혼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더없이 훌륭한 이기이자 경이로운 도구이며 영광스런 매개체로서 창조되었다.

영혼은 고안하고, 마음은 창조하고, 몸은 체험한다. 그 순환구조는 완벽하다. 그러고 나서 영혼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만일 영혼이 자신이 체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무슨 이유에서인가 다른 체험을 바란다면, 영혼은 그저 새로운 자아 체험을 고안해내서, 문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꾼다.

그러면 몸은 이내 새로운 체험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는 이것의 가장 훌륭한 예였다. 너희는 예수가 어떤 식으로 부활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믿지 않는가? 믿어라. 그런 일은 일어났다!)

그러나 영혼이 결코 몸이나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리란 것도 사실이다. 나는 너희를 삼위일체의 존재로 만들었다. 너희는 내 형상대로, 나와 꼭 같이 만들어진, 삼위일체의 존재다.

자아의 세 측면들은 결코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각자 한 가지 기능씩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기능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또 실제로는 어느 한 기능이 다른 것들보다 먼저 작용하지도 않는다. 세 가지 기능들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동등한 방식으로 연관되어 있다.

고안-창조-체험. 너희는 고안한 것을 창조하고, 창조한 것을 체험하며, 체험한 것을 생각해낸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너희의 몸이 뭔가를(예컨대 넉넉함을) 체험할 수 있다면, 너희는 곧 자신의 영혼 속에서 그것에 대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고, 너희의 영혼은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즉 넉넉하다고) 그려볼 것이며, 그리하여 너희의 마음에 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공해준다. 그 새로운 생각은 더 많은 체험을 가져오고, 몸은 새로운 현실을 계속되는 존재 상태로 받아들이고 살기 시작한다.

너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하나이다. 이점에서 너희는 내 소우주, 신성한 전체이고, 성스러운 일체이며, 총체이자 실체이다. 이제 너희는 어떻게 해서 내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인지 알고 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궁극의 수수께끼, 즉 너희와 나의 정확하고 참된 관계를 설명해주겠노라.

너희는 내 몸이다.

너희의 몸이 너희의 마음과 영혼에 속해 있듯이 너희는 내 마음과 내 영혼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체험하는 모든 건 바로 너희를 통해서 체험하는 것이다.

너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하나이듯이, 내 몸과 마음과 영혼 역시 하나이다.

그러므로 이런 신비를 이해한 많은 사람들 중에 나사렛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얘기해줄 것이다. 언제고 너희가 은밀히 알게 될, 이보다 더 엄청난 진실들이 존재한다는 걸. 왜냐하면 너희가 바로 내 몸일 때 나는 또 다른 존재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래요! 전 당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다. 그리고 내 생각엔 너도 위대하다! 너와 내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너는 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 온갖 결점과 온갖 잘못들, 온갖 죄악들을 눈앞에서 보는데 어떻게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너희에게 말하나니, 어떤 죄악도 없다!

그게 사실이었으면 좋겠군요.

너희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그것도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이다! 묘목이라고 해서 그 나무가 덜 완벽한 건 절대 아니다. 조막만한 아기도 어른과 똑같이 완벽하다. 그것은 완벽자체이다. 어떤 일을 할 수 없고, 어떤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게 그 아기를 좀 덜 완벽한 존재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느 아기나 실수를 저지른다. 일어서서 뒤뚱뒤뚱 걷다가는 넘어진다. 아기는 엄마 다리에 매달려 흔들거리면서 다시 일어선다. 이것이 그 아기를 불완전하게 만드는가?

완전히 그 반대이다! 아기의 그런 모습은 완전히 통째로 반하게 하는 완벽 그 자체이다.

너희 역시 그러하다.

...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는 게 나쁜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무엇을 하려는가에 따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닌 시기에 너무 일찍 일어났다는 것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 '잘못되었다'는 너희 주장에는, 예정되지 않은 때에 이 우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 우주에서는 모든 일이 완벽하다. 신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다.

너희가 모든 것에서, 너희가 동의하는 것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특히) 너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에서까지 완전한 완벽성을 볼 때, 너희는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Ÿ 우리는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 「자신 아님」을 지나는 길임을 예수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불완전한 길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따라서 그것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길 역시 '완벽하다'고 보았기에, 누구나 그들이 원하는 꼭 그대로의 존재 상태로 있을 수 있게 받쳐주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도움을 청한 사람은 누구나 도움을 받았다.

그는 누구도 거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준 도움이 그 사람의 충만하고 진실한 바램을 받쳐주는지 언제나 조심스럽게 살폈다.

맨 처음 본 무지개와 갓 태어난 아기의 맨 처음 울음소리에서. 장엄한 일몰의 마지막 빛과 장엄한 삶의 마지막 숨결에서.

나는 시간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희와 나의 합일은 완벽하다. 그것은 언제나 그러했고, 언제나 그러하며,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너희와 나는 하나이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제 가라, 가서 너희의 삶이 이 진실을 진술하는 것이 되게 하라.

너희의 낮과 밤들이 너희 내면에 있는 가장 고귀한 관념의 반영이 되게 하라. 너희의 「지금」 순간들이 신이 너희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낸 장엄한 황홀경으로 가득하게 하라. 너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라. 어둠 속의 빛이 되라. 그러나 어둠을 저주하지는 마라.

빛을 가져오는 자가 되라.

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라.

나는 너희가 여러 다양한 차원에서 이런 결정들을 내리고 있음을 본다. 차도에 나가 놀겠다고 작정하는 아이는 죽겠다고 선택하는 게 아니다. 그 애가 다른 여러 가지 선택을 하고 있을 순 있지만, 죽는 건 그중 하나가 아니다.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안다.

여기서 문제는 아이가 죽기로 선택한 데 있지 않고, 죽는 걸 포함해서 하나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선택들을 내렸다는 데 있다. 아이에게는 이 점이 명확하지 않다. 그 애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것은 빠뜨린 자료다. 그리고 그 때문에 아이는 명확한 선택, 더 나은 선택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보다시피 너는 그것을 완벽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신인 나는 너희의 선택에 절대 개입하지 않겠지만, 그 선택들이 어떤 것일지는 항상 알 것이다.

따라서 네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너는 그 일이 그런 식으로 일어난 건 완벽하다고 보아도 좋다. 신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완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 삶의 설계-그 속의 사람과 장소와 사건들-모두가 완벽 자체의 완벽한 창조자인 너희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너희에게서, 너희로서, 너희를 통해서의‥‥‥ 나에 의해서.

그런데 우리는 이 공동창조 과정을 의식하면서 함께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한 채 함께할 수도 있다. 너희는 자각하면서 삶을 거쳐 갈 수도 있고, 자각하지 못한 채 거쳐 갈 수도 있다. 너희는 너희 길을 자면서 걸어갈 수도 있고, 깨어서 걸어갈 수도 있다.

너희가 선택하라.

그렇지 않다. 지금껏 창조된 모든 영혼은 한꺼번에 창조되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 있다. 하지만 내가 전에 설명했듯이 한 영혼(내 일부)이 궁극의 실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해내고 다시 한 번 자신을 새로이 재창조할 수 있도록, '다시 출발하는', 말 그대로 '모든 걸 잊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신은 자신을 계속 다시 체험한다.

영혼은 또한 원한다면 몇 번이고, 특정수준에서 특정 생명형상을 '재활용하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환생이 없다면, 물질 형상으로 되돌아갈 능력이 없다면, 우주 시계가 눈 한번 깜박이는 것보다 몇 십억 배 더 짧은 시간인 한 생애 안에, 영혼은 자신이 이루려는 모든 것을 이뤄야 할 것이다.

그러니 그렇다, 환생은 당연히 사실이다. 그것은 진짜고, 그것은 유의미하며, 그것은 완벽하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네게 그런 도구들을 주고 있다.

예, 당신은 그러고 계시죠. 제가 묻기도 전에 답하시면서요

언제나 그렇듯이.

언제나 그렇듯이요. 그러니 제게 말해 주십시오. 어떻게 해야 제가 믿음을 배울 수 있을지를요.

믿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믿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믿음을 배울 수 있다고요?

그렇다.

제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서 어떤 것도 원하지 않고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내가 뭔가를 놓고 너희를 믿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 같군요.

맞았다.

그렇다면 최고 수준의 믿음trust은 믿을 필요가 없는 것(having to trust)인가요?

또 맞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에게 어떤 것도 원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까?

그것이 이미 자기 것임을 깨닫는 것으로. 너희가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이 이미 너희 것임을 깨닫는 것으로.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답하리란 걸 깨닫는 것으로. 그러니 청함은 불필요하다.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걸 청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바로 그거다.

하지만 그것을 이미 갖고 있다면. 왜 굳이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까?

자신이 이미 그것을 갖고 있음을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다.

내게 뭔가가 필요하다고 인식하면, 나는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말씀인가요?

너는 자신이 그것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제가 신이 내 모든 필요를 채워 주리라 여기면, 나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겠죠.

맞다. 믿음이 그토록 큰 힘을 갖는 이유가 그것이다. 만일 너희의 모든 필요가 항상 채워지리라고 믿는다면, 원리상 너희는 어떤 필요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것이 진리이니, 그것은 너희 체험이 되고, 따라서 너희의 믿음은 「정당화될」 것이다. 너희는 그냥 자신의 인식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내가 기대하는 것을 갖게 된다는 겁니까?

그렇다, 그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참된 선각자는 기대의 공간 밖에서 산다. 그는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왜요?

그는 이미 자신이 모든 걸 갖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특정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전체의 어떤 부분이든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는 그 모두가 완벽하다는 것, 삶이란 완벽히 자신을 완전히 연출해 내는 것임을 안다. 이런 상태에서는 믿음trust이 필요하지 않다.

혹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믿음trust」이 「앎knowing」으로 되는 거군요.

그렇다. 어떤 것과 관련해서든 자각awareness에는 희망hope, 믿음belief, 앎knowing이라는 세 단계가 있다.

너희가 뭔가에 대해 「희망」을 가질 때, 너희는 그것이 사실이거나 일어나길 바란다. 하지만 너희는 그 말의 어떤 의미에서도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너희가 뭔가에 대해 「믿음」을 가질 때, 너희는 그것이 사실이거나 일어나리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확신하지 못 하면서도 자신이 확신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믿음에 반대되는 요소가 너희 현실에 나타나지 않는 한, 너희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한다.

너희가 뭔가에 대해 「앎」을 가질 때, 너희는 그것이 사실이거나 일어나리라고 확신한다. 너희는 그 말의 모든 의미에서 확신하고 있다. 그리하여 설령 그 앎에 반대되는 요소가 너희 현실에 나타난다 해도, 너희는 계속해서 확신한다. 너희는 있는 그대로를 알기에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것으로 당신을 믿는 걸 배울 수 있는 거군요!

맞았다. 너는 완벽한 일이 벌어지리란 앎에 이르렀다.

특정한 일이 벌어지리란 것이 아니라 완벽한 일이 벌어지리란 것이고, 너희가 좋아하는prefer 일이 아니라 완벽한perfect 일이 벌어지리란 것이다. 너희가 깨달음으로 나아 갈수록 이 둘은 하나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너희는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일을 좋아한다. 그 사건을 완벽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일어나는 일-그 일이 어떤 것이든-에 대한 너희의 선호다. 「놔두어라, 신이 알아서 하도록」이란 게 이런 것이다. 선각자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을 좋아한다. 너희 역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좋아할 때,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